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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환의 새 앨범이 나오면 사람들은 말한다. "이승환의 앨범이라는데 무슨 말이 더 필요해?" 이승환에 대한 팬들의 전폭적인 신뢰가 간접적으로 말하듯, 1989년 그의 첫 앨범 『B.C 603』 이후 17년이라는 세월 동안 그가 걸어온 행보는 의미심장하다. '플란다스의 개'의 동화적 순수함과 '덩크슛'의 소년의 수줍은 소망에서부터 '한 사람을 위한 마음', '천일 동안' 같은 발라드의 처절한 슬픔, 『카르마』, 『에그』 등의 앨범 등을 통해 꾸준히 보여주고 있는 락에 대한 탐구까지…. 발라드, 락, 힙합 등 장르에의 규정이 무의미한 그가 지금까지 추구한 것이 있다면 "자신의 이야기"를, 자신이 원하는 방법으로 "하나의 오차도 없고, 하나의 오점도 없는" 완벽한 사운드로 표현하여 앨범에 담는 것. 그 바람을 이루고자 자본의 힘에 휘둘리지 않기 위해 스스로 자본가가 되어(기획사 드림팩토리 대표로서) "다른 사람들이 두 세 시간 하는 작업을 스물 세 네 시간"을 들여 할만큼 편집증에 가까운 완벽주의로 자신의 열정을 불태워왔다. 그 결과물로 그가 지금까지 이 세상에 내놓은 총 8개의 정규 앨범. 여기에 한 장을 보태어 9번째 정규 앨범 『Hwantastic』 을 최근 발표한 이승환을 서울 성내동에 위치한 소속사 구름물고기 사무실에서 만났다. 만난 시간은 밤 11시 30분. 모 케이블 방송의 녹화를 끝낸 뒤였다.
이제 CD는 내지 않겠다 서둘러 인터뷰가 진행될 장소에 도착한 이승환. 그가 제일 먼저 챙긴 것은 물에 탄 단백질 파우더였다. 최근 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스케줄을 소화 중이라(그 날도 아침 9시 반에 일어났다고 한다. 평소 기상시간이 오후 두 시인 그에게는 엄청난 일인 것.) 요즘 심취하고 있는 운동을 못해 초조하다며 이렇게 틈틈히 단백질을 섭취하며 보완을 한다고 한다. 이제는 명실공히 사십 대를 훌쩍 넘어섰지만 여전히 동안이며, 목소리는 경쾌하다. 듣는 사람을 기분 좋게 할 만큼. "요즘 활동을 굉장히 활발히 하시는 것 같아요." "제가 이제 소속가수가 되어서요. 회사에서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놔두는 거예요. "(웃음) "이번 9집 『Hwantastic』를 마지막으로 이제 CD 발매를 하지 않겠다고 하셨는데 이유가 뭔가요?" "앞으로 CD라는 매체가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죠. 자극적이고 극단적인 표현을 하는 것은 사회적 환기가 필요하다 생각해서에요. 문화 안에서 어떤 것은 공존하고, 어떤 것은 진보하고 또 어떤 것은 보존되어야 하는 것이 있죠. '사운드'라는 것이 음악의 본질적인 면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해요. 지금 음반 산업이 사운드의 중요성은 간과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경향이 있다고 판단되어서, 지금 CD 발매를 했을 때 한번쯤 생각해봐달라, 라는 의미에서 과격한 표현을 한 거예요. 음악을 산업이 아니라 문화로 봐달라는 관점에서 시작한 거죠." "이승환 씨가 더 이상 CD를 내지 않으면 우리나라 음반 산업에 타격이 정말 심할 거 같은데요?" "제 다음 정규 앨범이 나올 2, 3년 후에는 정말 CD가 없어질 가능성이 있어요. 사실 전 4년 전부터 얘기 했어요. '속도 봐, 속도' 하면서요.(웃음) 현재 우리나라에 오프라인 매장이 200개 정도 밖에 없어요. 이런 것이 세계적인 조류이긴 하나 지적재산권이 보장된 다른 나라와 비교해보면 우리나라 음악하는 사람들은 점점 힘들어지는 거죠. 특히 저는 우리나라 디지털 음악 시장이 넓어진다는 주장에 대하여 언론이 호도하는 부분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사실 십대 시장만 늘어난 거에요. 이, 삼십 대 중에서 음원을 온라인에서 다운받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벨소리를 자주 바꾸지도 않아요. 지금 데뷔하는 신인 중에 싱어 송 라이터는 거의 없구요. 드림팩토리에 녹음실이 있긴 하지만 요즘 신인 가수가 녹음실에 온 적은 거의 없어요. 본인들의 노래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모르고…. 결국 연예인만 살아 남는다는 얘기가 거기서 나오는 거죠. 아이돌 그룹이 점점 더 득세할 것인데... 그것을 나쁘게 평가하는 것이 아니에요. 현재 시장이 진짜 음악하는 친구들은 죽고, 아이돌 그룹 같은 가수들만 살아남도록 형성되고 있다는 겁니다. " "이런 얘기를 동료들과 하기도 하나요?" "네. 하죠. 하지만 요즈음은 거의 자포자기 상태라. 이 삼 년 전에는 자주 얘기했었는데, 지금은 잘 안 해요. 다들 자전거 타고 다니죠. 앞으로 자신들이 뭘 해야 할지도 생각하고. 전업을 한다면 음악 이외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같은…." "이승환 씨는 죽을 때까지 음악을 하실 건가요?" "네. 하지만 점점 형편이 어려워진다면 취미로 할 수 밖에 없겠죠. 사실 지금도 후배들에게는 음악은 경제 활동이 아니야. 그렇게 얘기하고 있어요. 예전에 네티즌들이 엠피쓰리를 공짜로 받으면서 했던 말들이 '너희들이 음악을 잘 못 만들어서 그런 거야' 했지만 음악을 잘 만드는 애들이 망했어요. 이쁘고 춤 잘 추고 그런 애들이 뜨고…. 그건 이율배반적인 거죠." "그럼 앞으로 음악 활동은 어떻게 하실 건가요?" "디지털 음원 중에서도 가급적 음질이 좋은 것으로 활동을 하기를 바라죠. Wav 정도가 지금으로서는 가장 좋다고 생각해요. 압축한 것이 아니라 손상이 없는 파일이니깐요." 이승환 최고의 앨범 『Hwantastic』 그리고 그의 변화 「사랑을 잃고, 살림도 잃었다. 그래서 이승환은 이번 9집을 스스로 '기둥뿌리 뽑아 만든 앨범'이라고 표현한다. 더 이상 CD라는 매체로는 음악이 제작되기 힘들 것이라고까지 말하니, 나중에 어떻게 되든 지금 할 수 있는 걸 다 쏟아 부었다는 절박함이 묻어난다. 이런 절망감을 스스럼없이 말할 수 있는 것도 다 놓아버린 자의 초연함 덕분이다. 그래서 『Hwantastic』은 '상실의 앨범'으로 규정된다.」(출처: 이즘http://www.izm.co.k 신혜림의『Hwantastic』 리뷰 중) 이즘의 신혜림 씨는 『Hwantastic』을 '상실의 앨범'으로 규정했다. 하지만 이승환은 "마니아들은 제 5집을 사운드가 가장 좋은 앨범이라 꼽는데, 그것을 능가했다고 생각"한다는 이번 9집. 개인적으로는 "프로듀서로서의 자긍심을 보여주겠다"는 각오로 만들었다. "이번 앨범 작업하면서 프로듀서로서의 자긍심을 보여주겠다, 그런 마음이 있었어요. 하나의 노래에 가장 어울리는 세션들을 꾸리고, 선곡하며 조합들을 만들어내는 과정, 전체적으로 앨범의 색깔을 만드는 것이 프로듀서라고 한다면 그것을 제대로 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쌓은 노하우를 다 모아서 이번 앨범에 집대성해서 녹여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편곡의 집중도가 굉장히 높았는데, 드림팩토리 식구들처럼 지내는 음악인들이 아니면 못했을 거예요. 편집 담당자가 편집을 해 오면 계속 깠어요. '안돼, 안돼'....다섯 번을 까요. 여섯 번째로 들고 왔을 때 '나 딴 애한테 맡길게' 이랬거든요. 사실 이런 것은 용납이 안되는 처사인데, '네. 형… '하면서 좋게 좋게 도와주었지요."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는 책도, 음악도, 영화도 있을 수 없겠지만 누구나 100% 인정하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아마 이승환이 만든 완벽한 사운드일 것이다. 그렇게 말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 이승환은 스스로 자신이 "완벽주의자이자 편집증자"라고 말할 정도로 '완벽에 대한 강박'이 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니다. "예전에는 완벽주의자였고, 편집증 같은 것도 있었어요. 지금은 될 대라 되라, 좋은 게 좋은 거, 내일은 없다,에요.(웃음) 예전에는 스물 네 시간 동안 했을 걸 이번에는 그냥 좋다고 끝내니까 회사 사람들이 다 좋아하더라구요. 체력적으로도 소모가 크지 않고. 제가 이번에 느낀 것이 음악이 많이 늘었구나,였어요. 예전에는 부족한 것을 채우려고 쫓기는 마음이었는데 이제는 실력이 좀 늘어있는데다 요령이 생겨서 좋은 게 좋은 거지 하고 사는 것 같아요. 이 정도는 좋은 거야… 하고 위안하며."
"사실 아무리 완벽주의자라고 해도 같은 일을 오래하면 재미없어질 때가 있잖아요. 그런 때가 있었나요?" "많았어요. 일로 느껴질 때…. 때가 되면 음반을 내야 하고,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서 내키지 않은 행사에 가서 노래를 부르고 그랬죠. 물론 지금도 일말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어요. 있는 직원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제가 버는 수입의 대부분은 거의 회사로 들어가고 있어요. 제가 가져가는 것은 별로 없어요. 그런 생각으로 살고 내일은 없고 미래는 없고 오늘 하루 최선을 다하고, 내가 책임져야 하는 사람들을 책임지겠다, 직원들 뿐만 아니라 밴드들, 공연 스탭들까지…. 옛날에는 그 무게감이 너무 막중하고, 억압적이었고 힘들었는데 요즘에는 많이 여유로와진거 같아요. "굉장한 생각의 변화인데.. 어떻게 그런 변화가 오게 되었나요?" "잘 모르겠어요. 잘 모르겠지만 나이가 들면서…. 오히려 이십 대 때 세상 눈치를 많이 본 거 같아요. 삼십 대 때 왜 그때 객기를 못 부렸을까,하고 이십 대를 후회하는 '붉은 낙타'를 만들었고. 사십 대가 되니까 더 객기 부리고 싶어요. 사실 생각이 더 어려져요. 그래서 담담하게 '난 내가 피터팬 증후군이라는 것을 알고 있으니 나 철딱서니 없는 사람으로 취급 되도 좋으니' 하고 그걸 인정하니까 더 여유로워지는 것 같아요. 이번 앨범 중에 'Rewind'라는 노래가 있는데, '너를 위해 살기를' 이라는 노랫말이 있어요. 우리 사회에는 강요된 생각들이 참 많아요. 이제는 획일적으로 받았던 교육, 생각. 사회가 요구하는 사상들을 기준으로 살지 말자, 는 생각으로 쓴 거예요." "생각이 긍정적으로 바뀌셔서 더 건강해지셨겠어요." "요새 운동을 많이 해서요. 하드코어, 스파르타식으로 운동을 하거든요. 8,9 KG 정도 늘었지요. 운동의 영향도 커요. 운동을 하면 긍정적 사고로 바뀌니깐. 제가 지금까지 너무 정신 노동만을 해왔잖아요. 그렇다면 거기에 걸맞는 몸의 움직임이 있어야 하는데 밸런스가 맞추어지면서 조화로움이 생긴 거죠." "그렇게 열심히 운동을 하는 이유는 뭐예요?" "어렸을 때 꿈이 이소룡이었거든요. 이소룡의 몸을 가지고 싶다는 로망이 있었죠. 그런 식의 어렸을 때 꿈을 실현한 것이 삼십 대부터였던 거 같아요. '키스'의 공연을 본 이후 큰 감명을 받고 그렇게 피 흘리며 기타 뽀개면서 하고 싶다는 꿈을 가졌어요. 그런 공연을 삼십대부터 하기 시작했고, 사십대가 되자 이소룡 몸을 만드는 것 그리고 오토바이 타는 것을 실현 중이에요. 무서워서 지금까지 오토바이 못탔는데, 얼마 전부터 스쿠터 타기 시작했거든요. 그렇게 하나씩 실현하고 있어요." 무대에서 땀 안 흘리는 가수들 인정 안 한다 생각해보면 이승환이 처음으로 하고, 이루고, 만든 것이 참 많다. 예전엔 ‘누구누구 몇 집’으로만 표기되던 앨범 제목을 『B.C 603』와 같이 앨범 전체를 아우르는 컨셉의 타이틀로 바꾼 것도 이승환이 처음, 앨범 안의 내지에 'special thanks to'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글을 쓴 것도 그가 처음, 라이브 공연의 중요성을 알고 먼저 준비하여 공연에 브랜드를 도입한 것도 그가 처음이다. 친구 '태호'(오태호)가 1988년에 음반을 의기양양하게 낸 것이 너무나 부러워 혼자 열 일곱 군데 음반사를 전전하며 허송세월을 한 것이 만 이 년. 보다 못한 아버지가 돈을 건네며 "한 번 해봐라. 망하면 깨끗이 포기하는 거다"하신 이후 시작된 이승환의 음악 인생. 1집 『B.C 603』은 비공식적으로 120만장이 나갔다고 추정되지만 그가 벌어들인 수입은 전혀 없었다. "레코드사에서 절 속인 거 같아요. 비공식적으로 120만 정도 나간 거 같은데…. 중간에 사기도 당한 적이 있었어요."(웃음) "지금까지 음악 활동 하시면서 많이 버셨나요?" "4,5집까지? 5집을 기점으로 내리막길을 걸었어요. 그 후로는 계속 까먹은 거죠. 제가 가장 많이 투자한 것이 스튜디오였거든요. 제가 지금도 가지고 있는 자부심이 우리나라에서 가장 업그레이드를 빨리 한다는 것. 신기술을 무조건 도입해요. 그래서 버는 것보다 늘 쓰는 게 많아요. 공연은 2002년부터 흑자가 나기 시작했어요." "남들보다 빨리 변화하고 적응하시는 것 같아요. 비결이 있나요?" "제가 어려서 그런 거 같아요. 젊은 감각이 있으니까. 요즘 애들이 좋아하는 것, 선진 기술을 꼭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했었어요. 아티스트들에 대한 예우를 한 것이 1999년도부터 였어요. 예전에는 대기실이라는 것이 진짜 대기하는 장소였어요. 공연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심리적 상태를 전혀 고려하지 않은, 배려없는. 모든 것을 다 때려부쉈지요. 전 외국 나가서 녹음도 많이 하고. 제가 외국 공연 보는 것도 좋아하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습득한 거 같아요. 그 때부터 우린 자부심을 가졌어요. 한국에선 우리가 최고다!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공연을 해요. 또 우리 스탭들이 나가서도 최고의 공연을 하구요. 공연 스탭 학원을 하고 있는 친구가 있는데 그 학원에서 배출된 학생들이 우리나라 공연의 50% 정도에 관여하고 있어요. 그 만큼 영향력을 끼치고 있다고 생각해요. 그걸로 잘 되자, 그런 것은 전혀 없구요. 그냥 올바르게만 공연을 할 수 있다면 그 바람이죠. " "공연하는 것 좋죠?" "네. 정말 그래요. 요즈음에는 더 그렇구요. 작년 말부터 그런 걸 느꼈어요. 3,4 년 전에는 공연 끝나면 사실 뻗었어요. 너무 힘이 들어서. 작년에는 전혀 그런 게 없더라구요. 부산 공연 끝나고 부산에서 서울 올라오는 버스에서 계속 수다 떨고. 이번 활동 중에 돌콘(돌발콘서트)이라고 해서 클럽 공연을 계획하는데 옛날에는 떨리고 긴장됐거든요. 요샌 같이 재밌게 놀아야지, 땀방울 흘리고 와야지, 그런 마음이 생겨요. 전 무대에서 땀 안 흘리는 가수들,그런 콘서트는 인정하고 싶지 않아요. 노래하다 보면 꼭 움직이지 않더라도 열정적으로 노래하다 보면 마음 속에서 뭔가 뜨거운 게 올라오거든요. "
"보면 가장 먼저, 1등으로 하신 것이 참 많은데, 혹시 경쟁심이 많으신 편인가요?" "전혀 없어요. 어려서부터 '지고는 못살아', 이렇게 말하는 성격의 소유자들 있잖아요. 이해를 못하겠어요. '지면 좀 어때?'하죠. 야망이 없어요. 전 1등 하는 것이 두려워요. 1등 하면 산꼭대기 위에 위태위태하게 서 있을 것 같아요. 예전부터 스포트라이트 받는 거 안 좋아했거든요. 제가 새로운 것을 자꾸 도입하는 이유는 제가 원래 새로운 것, 새로운 문물, 기기 등을 좋아하고 해서 받아들이는 거지 1등이 되기 위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에요." "이승환에게 팬은 어떤 의미인가요?" "예전에는 팬의 고마움을 잘 몰랐어요. 팬 클럽은 만들지 않겠다,라는 것이 제 생각이었거든요. 팬 클럽이 가지고 있는 폐해가 굉장히 크다고 생각했고, 집단 이기주의의 대표적인 형식이었고…. 자생적으로 좋아해주시면 감사할 따름이었죠. 최근에는 식구처럼 느껴지고 있어요. 왜냐하면 17년 째 똑 같은 얼굴을 보는 그 느낌…. 가끔 농담처럼 얘기해요. 참 안타깝다고, 저것들 다 늙어서, 저게 다 뭐냐고…. 편하니까 그런 거죠. (웃음) " "음악에 담고 싶은 것은 무엇인가요?" "내 얘기요. 난 내 이야기를 하니까…. 내 얘기를 담아서 그 음악이 청자들에게 주입되었을 때, 청자들의 것으로 만들어지기를 바래요. 난 단지 내 얘기를 했을 뿐인데, 각자에게 다른 의미로 받아들여지면서 그 의미의 스펙이 커지는 것. 그게 참 재미있고 보람있어요." "이승환 씨 인생에 있어서 음악은 어떤 의미죠?" "음악은 희망이죠. 절망이 많았지만, 어김없이 뜨는 아침 태양처럼. 절망 속에 있더라도 희망을 갖게 해주는 것…." "이제 어른들 세계의 때가 묻은 저로서는 '어린왕자'라는 닉네임을 갖는 것이 미안하다는 생각이 들어요."라고 웃는 이승환. 그와의 인터뷰는 이렇게 끝났다. 뮤지션으로서가 아니라 '연예인'으로서의 기획 가수가 대부분이 될 수 밖에 없는 요즘의 음악 산업 현장. 어쩌면 그의 말대로 정말 3, 4년 후에는 CD라는 매체가 없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옛날 라디오를 녹음하던 카세트 테이프가 없어지고, 지직하던 소리가 정감 있었던 LP가 없어졌듯이 말이다. 그러나 이승환의 음악은 계속 새롭게 만들어져 나오리라는 짐작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새로운 것을 늘 받아들이고 적응하고 응용하는 그의 젊은 마음이 있기에, 명석함이 있기에. 그리고 음악을 희망으로 생각하는 그의 정신이 있기에 말이다. |